온라인 전시
「토지의 상처: 228사건유적지-북부지역」특별전
1단계 전시: 심야 소란

 發佈日期:2021-06-19

전시기간/2021년2월 21일 ~5월 16일
전시장소/2·28 국가기념관(타이베이시 난하이로 54호 2층 남측)
개관 시간/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관일/매주 월요일(단, 월요일이 국정공휴일일 경우 그 다음날 휴관), 춘절기간, 정부 공고 자연재해 휴무일, 본관에서 별도로 정하여 공고한 휴무일.
지원기관/내정부
주최기관/2.28사건기념기금회、2.28국가기념관
주관기관/사단법인 타이완상생청년협회

머리말

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은 대만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사건을 겪은 장소와 건물들은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으며 228사건의 ‘228유적지’가 되었다.

이러한 유적지에는 정부의 관공서, 시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생활장소 그리고 시민의 희생과 피해를 입은 장소가 있다. 이번 전시회는 공간을 주축으로 삼고, 문헌 기록과 장소, 건축, 노선에 대한 기억을 구술한 것을 참조하였기에 더 구체적으로 또 역사적 사건을 점과 선에서 면에 이르는 복잡한 양상들을 조금이나마 차례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228사건 발생의 시간의 순서와 현시縣市의 공간 이라는 두개의 시각으로 3단계 전시회 주제를 기획하였다. : 1단계 전시에서는 전쟁 후 초기 타이완 즉 1947년2월 사건 발생지-타이베이 천마 다방 불법담배 단속 유혈사건에서부터 같은 해 3월1일 임시 계엄까지의 상황을 서술의 주축으로 삼았다. 2단계 전시에서는 타이베이시 서쪽, 단수이강淡水河 이남의 타이완 북서부 현시에서 타이베이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을 접한 뒤 각지의 시민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했는지, 집회와 토론 상황은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3월8일 ‘남경정부 군대’가 상륙 후 각지에서 유화정책과 지방을 소탕한 정황들을 서술한다. 마지막 3단계 전시에서는 사건 발생 기간 타이베이 북동부와 타이완 동부 이란宜蘭,화리엔花蓮 지방 민.관의 상호관계. 특히 지룽항基隆港에서 육군 재편성된 제21사단이 상륙한 후 무차별 사격과 총살로 시민 사상자가 발생한 역사를 보여주게 된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이번에 전시되는 유적지의 범위는 타이베이臺北, 지룽基隆, 타오위안桃園, 신주新竹, 먀오리苗栗 그리고 동 타이완의 이란宜蘭, 화리엔花蓮 등의 현시縣市가 포함된다.


1단계 전시: 심야 소란
전시기간:2021년2월 21일 ~5월 16일

 1945년 10월 25일 타이완은 패전국이 된 일본의 식민지로서 그 통치권이 일본에서 남경정부로 이전되자 많은 사람들은 일본과는 다르지만 낯선 ‘조국’이 타이완 주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식민통치를 격은 타이완인들은 점점 새정권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는데 -- 즉 국민당정부의 통치의 부당함과 부정부패, 그리고 공권력의 남용은 불만의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켰다.

 1947년 2월 27일 불법담배판매 단속의 부당함이 오히려 사상자를 낫게 되자 오랫동안 싸여온 불만의 정서를 폭발시켰다. 다다오청(大稻埕)의 충돌은 다음날 행정장관 공서 앞의 사병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급하게 라디오 방송국으로 도망친 시민들은 ‘전국방송’을 통해 장관 공서 앞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 소식을 전 타이완에 알리자 국민당정부에 대한 시민의 불만을 전면적으로 폭발하게 했다.


2단계 전시: 총소리 이후
전시일: 2021년 5월20일~8월15일

 3월 1일, 민의대표들은 불법담배단속 유혈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소집하였고, 3월2일에는 228사건처리위원회(二二八事件處理委員會)로 개편하고 중산당(中山堂)에서 총회를 열어 각 방면의 대표를 포용함으로 사건이 원만하게 마무리 짓게 되기를 기대했다. 4일에 전 성省 17개 현시 처리위원회를 조직하여 통지함으로, 사건 처리의 후속조치가 낙관적으로 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각지에 처리위원회가 성립되는 것과 동시에 천이(陳儀)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쳐서 대륙에서의 파병을 요청했다. 천이는 중앙정부에 병력을 요청하면서 섬내에서도 병력을 이동시켰지만 대외적으로는 군사진압은 없을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사건은 더 이상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3단계 전시: 섬의 만가
전시기간:2021년 8월 19일 ~11월 14일

 1947년 3월 8일,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투입된 군대는 제21사단으로 편성하고 지룽항基隆港과 까오슝항高雄港에 나누어 상륙하였다. 행정장관공서는 명령을 내려 처리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각 현시의 처리위원회 분회 시국 토론에 참여한 구성원과 시민을 색출하여 체포와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다. 군과 경찰은 계엄의 계략을 꾸며 유화와 토벌을 집행함으로 많은 시민들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228사건의 협상과 소통이라는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국민당정부의 무력진압이라는 국면으로 향하게 되어, 섬에 비통의 기억을 갖고 있는 대학살과 총살의 장소를 남기게 되었다.


  • 臺北市公會堂 타이베이시 공회당|中山堂 중산당
  • 臺灣省參議會 타이완성 참의회|二二八國家紀念館 228국가기념관
  • 天馬茶房 천마다방|南京雙子星大樓 난징 쌍탑 빌딩
  • 港町派出所 강딩 파출소|臺北市政府警察局刑警大隊檔案大樓 타이베이시정부 경찰국 형사경찰대대 기록보관빌딩
  • 臺北市警察局 타이베이시 경찰국|臺北市政府警察局 타이베이 시정부 경찰국
  • 臺北憲兵隊 타이베이 헌병대|憲兵指揮部臺北憲兵隊 헌병지휘부 타이베이 헌병대
  • 臺灣省政治建設協會辦公處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 사무소|統一名廈 통이 빌딩
  • 太平町二丁目派出所 타이핑정2정목 파출소|臺北市大同分局延平派出所 타이베이 다퉁경찰분서 옌핑파출소
  • 專賣局臺北分局 전매국 타이베이지국|彰化商業銀行臺北分行 창화상업은행 타이베이 지점
  • 專賣局總局 전매국총국|臺灣菸酒股份有限公司總部 타이완 술ㆍ담배 공사 총본부
  • 臺灣省行政長官公署 타이완성 행정장관 공서|行政院 행정원
  • 郵政總局 우체총국|中華郵政臺北北門郵局 중화우체 타이베이 베이먼 우체국
  • 鐵路管理委員會 철도관리위원회|國立臺灣博物館鐵道部園區 국립타이완박물관 철도부 단지
  • 人民導報社 인민도보사|撫臺街洋樓 푸타이가 양옥
  • 臺灣新生報社 타이완 신생보 신문사|新生報業廣場大樓 신생보광장빌딩
  • 臺灣廣播電台 타이완라디오방송국|台北二二八紀念館 타이베이 228기념관
  • 臺灣省警備總司令部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國防部後備指揮部 국방부 예비역 지휘부
  • 保密局臺灣站站長林頂立住宅 보밀국 (방첩 정보기관) 타아완지부장 린딩리 사택|豪景大酒店 리버뷰 호텔
  • 基隆要塞司令部 지룽 요새사령부|基隆要塞司令部 지룽 요새사령부
  • 元町派出所 위안정 파출소|基隆東岸廣場 지롱동안광장

전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을 접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민당정부가 타이완을 접수하고(일시적 군사점령), 행정장관 공서와 경비총사령부를 설립하고 민정과 군정을 나누어 업무를 처리하였고 이와 동시에 정보 공안 기구(군통국, 중통국)도 도島내로 들어왔다. 같은 해 10월 25일, 타이베이시 공회당(지금의 중산당中山堂)에서 중국전구 타이완성 항복식을 거행하고 타이완 통치 권력이 이때부터 이전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228비극의 발단이었던 것이다.

 전쟁종식과 통치자의 교체는 타이완 사람들에게 식민지라는 위치에서 해방을 얻게 된 것이며, 정치와 경제 민생에 새로운 기회를 펼쳐줄 것이라 희망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지방자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6년4월 15일 각 현시의 참의회는 30인의 참의원을 선출하고 타이완성 참의회를 구성하였는데 타이완 본토에 상주하는 본 섬의 인사의 비율이 가장 많았고, 일부는 일본통치시기에 중국에 거주하다 전쟁이 끝나자 타이완으로 귀환한 ‘반산 半山’이 있었다. 성참의회는 당시 소수 타이완사람이 주가 된 정치기구였다.


타이베이 공회당



유적지 소개

 1928년 총독부가 청나라의 포정사 관아(일부건물은 타이베이 식물원에 옮겨져 진열됨)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타이베이시 공회당을 설립할 것을 계획하였고 1936년에 준공하였다. 전후 1945년에 이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국전구 제15 항복접수구(타이완,펑후 포함)의 항복접수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의식이 끝난 후 공회당은 ‘중산당’으로 개명하여 정부차원에서 거행하는 의식 대회장, 민의대표의 의사장, 시민들의 집회소 및 문예 전시와 공연을 여는 장소가 되었다. 2001년에 복구작업을 마무리하고 2019년에는 국정고적으로 지정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5년 10월 25일 중국전구 타이완성 일본 항복식이 공회당 대연회장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측 대표 안토 리키치(安藤利吉)는 항복 성명에 서명을 하고 ‘중국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 및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서부자 제1호 명령’에 따라 항복식을 마쳤다. 이 의식으로 정식 국제조약에 의한 주권이양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중화민국은 이때부터 국내법으로 타이완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타이완성 참의회



유적지 소개

 일제시대에 타이완 총독부는 현대화 교육의 실시에 발맞춰1901년 ‘타이완교육회’를 창설하고, 1928년에는 ‘타이완교육회관’을 설계, 건축하였는데 이는 총독부 건설과장 이테 가오루(井手薰)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31년 5월 준공하여 사용하게 되어 당시 다양한 연설회와 교육성과 발표회장으로 삼았으며 영화 방영과 타이완미술전시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쟁 후 1946년 5월 타이완성 참의회는 여기에서 창립대회를 거행하였으며 다 다음해 연말엔 여기서 임시 성의회를 새롭게 설립하였고 1958년 타이중臺中 우펑霧峰으로 이전하였다. 1959년 미국은 타이완주재 신문처(홍보처, United State Information Agency)를 이곳으로 이전해 왔고 1979년 대만과 미국이 단교한 후에 이를 ‘미국문화센터’ 이라 개칭하고 2002년에 이르러서 이전해 갔다.

 1993년 본 건물은 시 지정 문화재으로 정해졌고 2007년 2월28일 정식으로 ‘228국가기념관’으로 등록하고 문화재를 수리복원 및 유적지 재활용 공사를 거처 2011년 2월 28일에 정식으로 개막 운영하게 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6년 5월 1일 타아완성 참의회는 창립대회 및 본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제1차 본회의 회기는 15일로, 국민정부는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파생된 문제에 대해 성참의원은 이를 엄하게 비판을 가했다. 왕티엔덩王添灯, 린르가오林日高가 정경 유착의 폐단을 폭로했고, 궈궈지 郭國基, 리완쥐李萬居 등은 타이완계 인사의 진용을 촉구했고, 린리엔중林連宗은 사법권이 아직 독립되지 않아 법원 판결은 결국에 중앙에 재가를 받아야 하는 등의 의제를 놓고 대정부 강력히 질문을 했다. 언론매체는 민주적인 큰 일에 고도의 관심을 보였고 《인민도보人民導報》, 《타이완신생보臺灣新生報》 등 언론은 회의 기간 중 매일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충돌 전날ㆍ 담배단속사건

 행정장관공서는 일제시대의 전매제도를 답습하고, 전매국총국과 각 현의 지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전매국의 경영은 타당하지 않았고 게다가 상품의 품질도 좋지 않았기에 밀수담배와 술이 범람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밀수 담배와 술의 단속 충돌사건이 잇따르면서 시민은 전매제도와 시민의 이권 다툼의 상황에 불만을 가지게 됐다.

 1947년 2월27일 오전, 전매국은 단수이항淡水港에 밀수입선이 성냥과 담배 50여 상자를 밀반입한다는 친챠오빈秦朝斌의 밀고를 접하고, 전매국 타이베이 지국 단속요원 푸쉬에퉁傅學通, 예더건葉得根. 성티에푸盛鐵夫, 종옌저우鐘延洲, 쟈오즈지엔趙子健, 류차오샹劉超祥 등 6명과 경찰대대 장궈지에張國傑, 허후이민何惠民, 차이호우쉰 蔡厚勳, 장치즈張啓梓 등 4명은 단수이淡水로 가서 검문하였고 밀반입 된 물건이 이미 타이베이의 가장 큰 밀수 물건의 집산지 중 한 곳인 천마다방에 옮겨진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명의 단속요원과 경찰은 먼저 근처 샤오춘위엔小春園에 가서 식사를 하고 7시 반쯤 ‘천마다방天馬茶房’에 도착하여 밀수한 담배를 단속하였는데 그 과정 중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228사건이 폭발되게 되었다.


천마다방



유적지 소개

 1941년 저명한 영화 해설자 잔티엔마詹天馬가 세운 ‘츠차디엔喫茶店’- 천마다방은, ‘완리홍萬里紅술집’, ‘펑라이거蓬萊閣’ 타이완요리 술집과 ‘볼레로波麗路’ 양식당과 인접해 있었고 당시 이 지역의 거리는 적지 않은 당시 문인과 학자들이 자주 모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교제의 장소였다. 1947년2월 27일 저녁 전매국 요원의 밀수담배 단속으로 인한 충돌로 228 사건이 폭발하였다.

 1998년 타이베이시정부는 난징서로南京西路 185호에 ‘228사건폭발지 기념비’를 세웠다.

 원래의 건물은 이미 2005년에 철거했고 2011년 현지의 문화역사학자들이 현재 건물 3층에 천마다방을 재생시켰지만 지금은 휴업 상태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27일 밤, 타이완성 전매국 타이베이지국 단속요원들이 천마다방에 도착하자 담배 노점상은 대부분 달아났지만 담배 노점상 린쟝마이林江邁만 도망가지 못하고 단속 요원에게 단속을 당하고 몸에 지니고 있던 금품과 담배를 몰수당하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애원했다. 당시 거리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으며, 노점상 여인을 위해 사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언쟁이 벌어지는 동안, 단속요원 예더건葉得根은 총대로 린쟝마이林江邁의 머리를 내려쳐, 구경하던 시민들은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둘러싸고 단속요원을 뒤 쫓았다. 단속요원 푸쉬에퉁傅學通은 그곳을 빠져나오다가 총기 오발로 지나가는 시민 천원시陳文溪를 쏴 죽이게 되자 사태는 더 격화되었다. 군중은 단속요원과 경찰이 도주한 방향으로 길을 따라 추격했다.


강딩 파출소



유적지 소개

 1937년 타이베이(臺北)주 북(北)경찰서소속 강딩(港町) 경찰관 파출소가 설치되었고, 전후 강딩파출소(港町派出所)로 개칭되었다. 원래 건축물은 1988년에 철거하여 개축하였으며, 현재는 타이베이시정부 경찰국 형사경찰대대 기록보관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타이베이시 형사경찰대대에서 운영하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7일 천마다방天馬茶房 앞 불법 담배 단속사건이 폭발한 후, 단속요원과 경찰이 시민에 의해 쫓기게 되었고 경찰 차이허우쉰蔡厚勳과 단속요원 성티에푸盛鐵夫는 먼저 샤쿠이푸딩下奎府町파출소에 피신하여 경찰대대부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하였다. 구조하러 온 경찰은 현장에 도착한 후, 차이허우쉰은 인력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인력거꾼이 끌고 가기 거절 하고 시민은 또 뒤에서 “때려라”라고 소리쳤고 차이허우쉰은 강딩港町파출소로 피신하여 구조를 요청했다. 이후 대대부에서 차를 보내와 차이허우쉰蔡厚勳이 간신히 경찰대대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에 성티에푸는 구조하러 온 경찰이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현장으로 돌아가 전매국 동료를 찾았지만 도착했을 시 경찰은 현장에 없었고 다만 시민들이 전매국 트럭을 해체하고 있는 것만 보일 뿐이어서 바로 강딩파출소로 피신하여 구조를 요청하였다. 구조 차량이 도착해서야 성티에푸는 비로소 그곳을 떠나 타이베이 헌병대로 향할 수 있었다.


타이베이시경찰국



유적지 소개

 1920년 총독부는 타이베이 남(南)경찰서(줄여 남서)설립하였고 타이베이시 공회당 광장 코너에 위치하였다. 일제시대에 북문이남20여개의 파출소 관리를 책임졌었다. 남서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2층 건물로, 수직으로 길게 늘어선 창문이 당시 타이베이 북(北)경찰서(현 신문화운동기념관)와 비슷했다. 전쟁 후 계속해서 경찰국으로 사용되어, 중산당 광장 시민활동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와 통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건축물은 1968년, 1988년 두 차례 개축한 뒤 완전히 철거되어 다시 지어졌고 현재는 타이베이시정부 경찰국건물이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7일 밤 천마다방(天馬茶房) 앞에서 시민과 단속원의 충돌이 폭발한 후, 단속요원과 경찰은 각각 인근 파출소로 도망가 구조를 요청하고 앞다퉈 타이베이시 경찰서로 돌아가게 되었다. 시민들이 타이베이시 경찰국을 포위하고 사고를 낸 당사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천숭지엔(陳松堅) 국장이 이를 거부하고 6명의 단속원을 헌병대로 보내자 시민은 헌병대로 몰려갔다.

 3월, 타이베이시 경찰국은 경찰이 연행자를 구금, 고문하는 장소로 삼았다.


타이베이 헌병대



유적지 소개

 일제시대의 타이완 헌병대 본부는 타이베이 성내 시먼西門가에 설치하였고, 전 타이완의 군사경찰을 주로 장악하고 또한 행정, 사법경찰을 겸하여 관리하였으며 섬내의 주요 지역에 헌병분대를 배치하였고, 타이베이 헌병분대는 바로 본부 내에 두었다. 건축물 정면에 국화 무늬를 새겨 놓았다. 전쟁 후에 타이완지역 군사접수위원회에 의해 접수되었다. 원 건물은 이미 철거되어 개축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7일 천마다방(天馬茶房) 앞 불법담배 단속사건이 폭발한 후, 격분한 군중들이 6명의 단속요원이 타이베이 헌병대에 보내져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헌병대를 포위하고 사고를 낸 당사자을 엄중히 처벌해 달라고 철야농성을 하였다. 헌병대 제4 여단장 장무타오張慕陶는 군중을 위협하고 권고도 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군중은 《타이완신생보臺灣新生報》신문사를 왔다 갔다 하며 소식을 전했고, 밤새워 타이베이 헌병대를 에워싸고 살인범을 내놓으라고 구호를 외쳤는데, 2월 28일 새벽 경찰대대가 해산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7년2월28일 불법담배단속사건 항쟁 가두시위 노선도

전날 밤 불법담배단속으로 인한 충돌로 인해 군경 기관이 사고를 낸 당사자 인도를 거절하자, 시민은 단속을 책임지고 있는 전매국과 행정장관 천이陳儀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하려 했다. 2월 28일 오전 시민단체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는 다다오청大稻埕 지역 시민에게 다차오터우大橋頭 광장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장칭추안張晴川이 총지휘를 맡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행렬은 디화迪化가, 옌핑북로延平北路, 베이먼 로터리를 지나 충칭남로重慶南路의 전매국 타이베이지국 쪽으로 꺾었습니다. 완화 용산사萬華龍山寺에도 시민들이 집결하였고, 먼저 난창가南昌街의 전매총국專賣總局으로 몰려가 항쟁하였다. 그 밖에 타이베이상업학교臺北商業學校 자치회 회장 랴오더슝廖德雄은 타이완 상공학교(현 카이난상공開南商工), 타이베이 공업학교, 타이완성립 법ㆍ상과 대학교(타이완대학교법학대학, 쉬저우로徐州路 캠퍼스), 청공 중고교成功中學와 옌핑단과대학延平學院 학생들을 소집하고 사회청년들의 항의대열에 합류했다. 오후가 되어 다다오청大稻埕, 완화萬華에서 온 시위군중과 각 학교의 학생들이 행정장관공서 앞으로 점차 모여들었다.


다다오청팀大稻埕隊: 다차오터우大橋頭의 광장→ 장산러우江山樓, 푸위안궁普願宮 →천마다방天馬茶房 → 타이핑정太平町2정목二丁目 파출소→철도관리위원회→ 베이먼北門로터리 →타이베이 우체국→ 전매국 타이베이지국 →타이베이 제1여자 중고교→전매총국 →난먼南門로터리 →신공원→타이완대학교 부속병원→행정장관공서


동맹파업.가두 항쟁

 전날 밤 천마다방天馬茶房의 불법담배단속 유혈 사건의 충돌은 시민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타이베이시 경찰국과 타이베이 헌병대로 찾아가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를 엄중히 처벌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더 큰 규모의 항쟁을 폭발시켰다. 1947년 2월 28일 오전, 다다오청大稻埕 에 모인 항쟁 시민들은 옌핑북로延平北路를 따라 북을 치며 거리에서 파업을 통고하고, 10시쯤 사고를 일으킨 기관인 전매국 타이베이 지국에 도착하여 항의하고, 지국 안에 있던 성냥, 담배, 술, 자동차 한 대와 자전거 7, 8대를 거리에 던져 놓고 불태웠는데, 둘러싸고 구경한 시민이 2,3천 명에 달했다. 시위 군중은 이어서 전매국 총국과 행정장관 공서 등지로 가서 항의를 했다.

 시민들의 항쟁행렬이 행정장관 공서에 이르렀을 때 경비병들은 일찍이 관공서 건물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시민들이 가까이 왔을 때 기관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여러 명이 사살당했다. 이로 인해 충돌은 계속해서 확대되어 갔으며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의 방송을 통해 섬 전체적인 항쟁으로 번져가게 되었다.


타이완성정치건설협회사무소



유적지 소개

 전후인 1946년 1월에는 타이완민중당 당원, 대만혁명동맹회 회원 등이 ‘타이완민중협회’를 결성하였고, 4월에는 행정장관공서의 명령을 받아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로 개명되었고, 장웨이촨蔣渭川이 다다오청大稻埕에 개설한 삼민서국(三民書局) 서점을 협회 회의 장소로 삼았다. 228사건이 폭발한 뒤 정치적 이유로 삼민서국(三民書局)이 문을 닫게 되었다.

 원 건물은 이미 철거되어 개축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 회원 랴오진핑廖進平, 황차오성 黃朝生, 장칭촨張晴川, 왕완더王萬得 등은 천마다방天馬茶行 옆 완리홍 술집萬里紅酒家 2층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소란 소리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살펴보았다. 불법담배 단속요원들과 경찰은 연이어 타이베이시 경찰국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은 그것을 알고 타이베이시 경찰국을 포위하고 사고를 낸 당사자를 건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일부 항쟁에 참여했던 군중들은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 사무실로 돌아와 긴급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고, 다다오청大稻埕과 완화萬華 일대의 지지자들과 학생들에게 연락해 다음 날인 2월 28일에 거리 항쟁을 버릴 것을 결의했다.


타이핑정2정목 파출소



유적지 소개

 일제시기 타이베이 북(北)경찰서 관할 타이핑정2정목太平町二丁目파출소는 1931년 1월 준공이 되어 건물1층 우측엔 소방소가 좌측엔 파출소가 있었다. 2층엔 40여평의 큰 홀이 있어서 시민들이 집회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전쟁 후 원건물의 기초 위에 한 개 층을 증축하여 3층건물이 되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파출소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8일 오전9시, 시민들은 전날에 불법담배 단속사건이 만족할 만한 해명을 얻지 못하자 길을 따라 징을 치며 항의를 했고, 총파업을 통고하자, 시민과 상점이 바로 호응하며 잇따라 문을 닫았다. 2정목 파출소를 지날 때, 이 지국의 황씨 성의 경장이 나서서 시위 군중을 제지하려 하였는데, 도리어 군중의 공격을 받아, 파출소의 유리와 물건들이 파손됐다.


전매국타이베이지국



유적지 소개

 1929년 천마상회辰馬商會 사장 가코오 도미河東富次는 이곳에 출자하여 점포를 세웠고, 1934년9월 전매국 타이베이 지국은 천마상회辰馬商會에게 임차하면서 가운데 있던 칸막이 벽을 텄다. 전쟁 후 타이베이 지국을 타이베이 분국이라 개칭하고 1951년 건축물을 국가 소유로 돌렸고, 1968년도에는 장화(彰化)은행 타이베이 지점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의 회랑와 내부 공간은 여러 번의 내부공사를 거쳤지만 외관은 여전히 대략적인 형태를 유지했다. 2012년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로 등록되었다.

 일제시대의 총독부는 1901년 전매국을 설립하고 아편, 소금, 장뇌, 담배, 술, 성냥, 도량형 그리고 석유 등의 민생물자를 통제하였고 총독부의 주요 재원으로 삼았다. 1945년 국민당정부는 타이완성 전매국으로 새롭게 조직하여 일제시대의 전매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고 아래로는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 타이둥, 가오슝, 신주, 화리엔항, 쟈이 등 8곳의 지국을 관할하였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 27일 저녁 불법담배단속의 유혈사태는 시민을 격분케 하여 다음날 거리로 나와 항의 시위를 하게 했는데 이는 다다오청大稻埕에서 시작되었다. 10시쯤 전매국 타이베이 지국에 도착하여 공정한 처리를 요구했지만 전매국에 있던 외성(外省, 중국대륙 출신)직원은 이미 도망갔고 단지 몇 명의 사무실 직원만 있었을 뿐이었다. 시민들은 사정할 대상을 찾지 못하자 지국 내 물품을 거리에 가지고 와 불사르는 것으로 항의를 표했다. 당시의 한커우가漢口街 이장 덩진이鄧進益는 나와서 저지하며 “당신들의 이런 행위는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이며 이곳은 일개의 지국으로 성중구의 담배를 판매할 뿐이니 만약 진정을 하려거든 총국으로 가야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자 시민들은 바로 전매국 총국과 행정장관 공서로 옮겨 항쟁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전매국총국



유적지 소개

 1922년 타이완총독부 건설과 기술사 모리야마 마츠노스케(森山松之助)가 설계한 것으로, 중앙에 우뚝 솟은 호위탑, 홍백(紅白)의 장식벽 그리고 아치창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총독부와 유사하다. 전매국은 아편, 소금, 장뇌, 담배, 술, 성냥, 도량형 및 석유 등 중요 민생 물자를 독점 판매했다. 전쟁 후, 행정장관 공서에 인수되어 1947년 5월에는 타이완성 담배ㆍ술 공매국으로 개정되었으며, 2002년에 이르러 공매제도가 개정된 후에는 타이완 담배ㆍ술주식회사 기업본부가 되었다. 1998년에 국정고적으로 정해졌다.

 1945년 국민당정부는 타이완성 전매국의 재편성을 받아들였다. 당시 식량난과 인플레이션, 실업률의 고공행진, 새정부 관리들의 공적재산을 개인적 사용, 부실 보고, 전매를 주관하는 전매국이 부실한 경영로 인해 술.담배의 밀수가 범람하고, 불법 담배 단속 충돌로 촉발된 사건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게다가 전매제도와 민과의 이권 싸움은 보기 좋지 않았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7일 저녁 천마다방의 불법담배단속 충돌은 다음날 오전 시민들이 전매국 타이베이 지국으로 대거 달려가 항의한 후, 전매총국으로 옮겨 지속해서 항쟁을 벌이며 호소했다. 총국은 이미 항의의 소식을 접하고 의도적으로 헌병 경찰을 파견해 기관총을 옥외에 배치하고 수비하게 했으며, 국장 런웨이쥔任維鈞은 이미 자리를 피했으며 다만 몇 명의 타이완출신 사무원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을 길을 따라 전매국 난먼南門공장과 직원기숙사를 때려 부수고 마지막엔 행정장관 공서로 옮겨 항의하였다.

 228사건후 전매국은 뭇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에 시민들의 반감을 피하기위해 ‘전매규칙’을 ‘공매규칙’으로 개정하고,’연-煙(담배)’이라는 글자를 ‘연菸(담배)’으로 일률적으로 고침으로 1947년 5월에 타이완성연주(담배.술)공매국으로 바꿨다.


타이완성행정장관공서



유적지 소개

 1920년 타이베이시가 시를 건설하는데 시역소市役所는 잠시 화산樺山 보통소학교(尋常小學校) 건물을 이용해 시업무를 보았다. 1937년 청사를 착공하였는데 타이완 총독부 건설과장 이데 가오루(井手薰)에 의해 설계되었고 1940년에 준공하였다. 1945년9월20일 타이완성행정장관공서가 설립되었고, 1947년5월16일 행정장관공서를 폐지 후에는 타이완성정부 사무청사가 되었고, 1957년 타이완성 정부가 난터우南投 중싱신촌中興新村으로 이전되자 이 건물은 행정원 사무청사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998년에는 국정 문화재으로 지정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8일 천마다방 불법담배 단속 유혈 사건 발생 다음 날 시위대는 다다오청大稻埕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전매국 타이베이지국, 전매국 총국 앞까지 항쟁을 벌인 후 행정장관공서로 옮겨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의 처벌과 전매제도 폐지 등을 요구하였다. 오후 한 시쯤 시민 수백명은 징과 북을 앞 세워 기차역에서 장관 공서를 향해 갔다.

 군중이 중산 남북로 입구에 도달하여 아직 공서 광장에 이르기 전에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병에 의해 저지당했다. 오래지 않아 총성을 울렸고 장관공서 지붕에 설치한 기관총은 시민들을 향해 발사하였고 이로 인해 일부 시민은 총을 맞아 사상되었고, 군중은 사방으로 도망 흩어져 도망갔다. 당시경비총사령을 겸했던 행정장관 천이陳儀는 오후 3시에 장관공서에서 타이베이지역에 임시계엄을 선포하고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이후에는 무장군경이 출동하여 시가지를 순찰하면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다른 부서 병력은 중요한 지역을 경계하였다.


우체총국



유적지 소개

 1920년대 말기 타이완 총독부는 원래 목조 건물이었던 타이베이 우편국청사를 개축하기로 결정하고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설계로 1928년에 착공하여 2년 후 완공하였으며 총 3층건물로 그 중 메인홀의 천장은 2층 높이로 만들었다. 전쟁후엔 우체총국이 인수해 1960년대에는 포치를 철거하고 원 건물에 4층으로 증축해, 현재는 중화우체 타이베이 베이먼(北門)우체국으로 우체사업과 공공전시, 전람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1992년 국정 3급 문화재으로 지정되었다. 2013년 외벽 정비를 마치고 2020년부터는 포치 재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8일, 군중은 다다오청大稻埕에서 전매국 타이베이지국, 전매국총국 그리고 행정장관 공서 앞까지 항쟁하며 청원을 했고 충돌사태는 계속해서 확대되어갔다. 경비총사령부는 오후3시쯤 타이베이시 시내에 임시계엄을 선포하고 무장 군경를 파견하여 시가지를 순찰하며 사방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여전히 시위를 계속했으며 베이먼(北門) 일대로 옮겨 갔고 천여명의 사람이 우체총국 앞에 모였는데, 군경이 쫓아냈지만 흩어지지 않아 충돌은 여전히 발생하여 십여명의 사상자를 나았다. 후에도 몇일동안 우체총국 앞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충돌이 빚어졌다.


철도관리 위원회



유적지 소개

 원 부지는 타이완 순무사 류밍촨(劉銘傳)이 1884년에 건설한 기계국에 위치하였다. 1895년 일본군 측이 인수한 후에 타이베이 군 무기 수리소로 바뀌었고, 1900년에는 철도국에 이전되어 타이베이공장으로 개칭되었다. 1918년에는 철도부 청사를 새롭게 지었다. 1945년 행정장관 공서 교통처의 철도관리위원회는 철도부를 인수하였다. 정부의 조직 개편을 거쳐, 1999년 교통부 타이완 철도관리국에 예속되게 되었다.

 2006년 여러 관공서는 이 곳을 ‘철도부 박물관단지’라는 컨셉으로 문화재 복원 및 재활용 공사를 하기로 합의하고, 2007년에는 국정 문화재으로 정했다. 거리 둘레에는 원래 근 40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중 일부 건물을 철거하여 10채만 남겨두었는데, 이중 8곳은 법정문화자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2020년 7월에 정식으로 대외 개방하여 운영되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8일 오후 3시경, 경비총사령부가 타이베이 시내에 임시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군중은 시위를 계속하며 베이먼北門 일대로 이동했다. 천여명은 여기에 모여 우정총국局, 철도관리위원회 및 철도경찰서 등 기관을 애워싸았고, 군경은 이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해산하지 않자 결국에는 충돌이 발생하여 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2월 28일 밤, 철도관리위원회 직원 숙소의 일부 직원과 가족은 인근 주타이완 미국영사관(현 타이베이시 중화로 1단 2호)으로 피난을 갔다. 철도경찰서는 사건이 커지자 타이베이臺北, 지룽基隆, 숭산松山 등 분소 경찰들을 철도관리위원회 및 직원 숙소 경계에 집중 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3월1일 철도관리 위원회 주변은 여전히 항쟁 충돌이 있었다. 주타이완 미국 영사관 부영사 조지 헨리 커의 저서《배반당한 타이완》(천룽청陳榮成 역)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시골에서 온 학생 몇 명이 철도국에 들어가 기차가 언제 운행을 재개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그저께부터 타이베이에서 떠돌고 있었기에 몹시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철도국장의 개인 경비병이 너무 긴장했다. 총성이 울리자 그 청년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어 철도특별경찰이 담장 안에서 그들의 총부리를 거리로 향하게 하자 또 2명의 행인이 피살되었다. 이 시각 이미 베이먼北門 교차로에 모여 있던 군중은 철도국에 쳐들어갔는데 때마침 군용트럭 한 대가 가까이 왔는데 아마도 철도국에서 부른 것 같았다. 통로는 막혔고, 기관총 및 소총의 갑작스런 무차별 사격은 군중을 해산시켰고 최소 25명이 피살당했으며, 백여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견제성 공격은 25명의 철도국 직원에게 길 건너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갈 기회를 주었고, 그들 각자는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도 없었으며, 후미의 부녀자나 고용인은 죽을 맛이었다. 일부 가장 먼저 영사관 문으로 달려 들어온 몇몇은 그들과 함께 도망 나온 동료들을 앞에서 대문을 닫으려했고, 가장 마직마에 온 몇몇은 있는 힘을 다해 담을 타고 올라왔는데, 그들이 담을 넘을 때 거리에 있던 군중들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져 영사관 담벼락에 맞았다. ”


온 섬에 방송하다

 1947년 2월 28일 오후, 항쟁하던 군중이 행정장관 공서에서 기관총의 공격을 받은 후, 신공원으로 옮겨 모여서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을 둘러싸고 타이베이시 불법담배단속 유혈 사건의 소식을 전 섬에 방송하고, 전쟁 후 시민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음과, 관리의 부정부패 그리고 식량은 해외반출로 시민들의 물자를 바닥 내는 문제를 규탄하며, 각지의 시민들이 호응해줄 것을 호소했다. 원 타이베이 시가지 항쟁 충돌이 온 섬에 이르는 저항행동으로 확대되었다.

 라디오 방송 외에 신문도 사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정부의 정책을 비판해 온 신문 매체들은 송페이루宋斐如가 운영하는 《인민도보人民導報》, 천왕청陳王成이 경영하는《민보民報》가 사건에 대해 많은 글을 썼고,《대명보大明報》,《중건일보重建日報》, 《화평일보和平日報》,《중화일보中華日報》 등 입장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 사건 경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소식을 각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인미도보사



유적지 소개

 1910년에 지은 오쿠라구미(大倉組) 타이완출장소 토목사업 주임 다카이시 다다조(高石忠慥)와 그의 동생 긴바라(金原風藏)가 건설한 ‘다카이구미高石組 본사’는 1층은 석재, 2층은 목재 구조로 ‘돌집-石頭厝’으로도 불렸다. 종전 초기 《인민도보人民導報》의 사무처였고, 228사건 기간엔 신문사가 폐쇄되었으며, 1950~1997년에는 경비총부 군법처 장교숙소로, 1997년에는 시 문화재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 화재가 발생하여 구조가 손상되었으며, 2007년 타이베이시 문화국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4년 4월 정식으로 대외 개방하였다.

사건과 사적

 1946년 《인민도보人民導報 》는 ‘삼민주의를 선전하고, 정부 정책을 홍보하며, 국민의 정확한 여론을 수립하는 것’을 취지로 삼고 창간하였다. 종전 초기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혼란상을 보도, 비판해 228사태 이전부터 정보기관이 예의주시했던 곳이며, 숭페이루宋斐如 사장은 정부당국의 압력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에 왕티엔덩王添灯이 후임 사장이 되었다.

 228사건 폭발 후,《인민도보人民導報》는 사건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는데, 3월에 경찰이 ‘사상 반동에 터무니없는 언론플레이로 정부를 비방하고 폭동을 선동하는 주요 세력’이라는 이유로 폐간조치 당했다. 송페이루宋斐如는 ‘반란을 음모한 주모자’라는 죄명으로 체포된 후 행방이 불명해졌다. 왕티엔덩王添灯은 타이완성 참의원으로서, 228사건이 폭발한 후 228사건처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그 후 ‘반란을 음모한 주모자’ 등의 여러가지 죄명으로 1947년 3월 11일 자칭 헌병 제4연대 특수요원에 의해 체포된 후 실종되었다. 수신(蘇新) 총편집장, 천원빈(陳文賓) 총주필, 기자 우커타이(吳克泰) 등은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기자 뤼허뤄呂赫若는 중공 지하조직활동에 투입했다.


타이완 신생보 신문사



유적지 소개

 《타이완신생보臺灣新生報》의 원 위치는 일제시기의 《타이완 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가 있던 곳으로, 당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문사로 원 위치에 있던 건물은 총독부 토목국 건설과 기술사 곤도 주로(近藤十郎)에 의해 설계되어 1908년 붉은 벽돌 건물로 준공되었다. 1944년 총독부는 신문 통제 및 전세 대응의 편의를 위해 당시 타이완의 주요 6개 일간지를 《타이완신보臺灣新報》로 통합했다. 전쟁 후 행정장관공서가 타이베이 본사와 전 타이완 각지의 지사의 부동산 및 인쇄출판 설비를 인수하고 공영 신문사《타이완 신생보臺灣新生報》를 설립하였다.

 원 건물은 이미 철거 및 개축되어 현 상업빌딩이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7일 천마다방(天馬茶房)의 불법담배 단속사건 충돌이 폭발한 후, 시민들은 타이베이 경찰서 앞으로 가서 살인자 처벌을 요구하였고, 헌병 제4연대장 장무타오張慕陶는 헌병에게 사격 자세를 취하라고 명령하자, 군중은 《타이완 신생보臺灣新生報》신문사 회랑에 숨어들었다. 일부 군중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사건의 경위를 신문에 게재해 줄 것을 요구했고 우진리엔吳金鍊 총편집장은 장관공서에서 이미 보도 불가를 지시했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신문사를 불태우겠다고 큰 소리쳤다; 리완쥐李萬居 사장이 나서 사건 보도를 동의하자 시민들이 비로소 흩어졌다.

그 다음날 2월 28일에서 3월 9일에 걸쳐 《타이완 신생보臺灣新生報》는 불법담배 단속 유혈 사건과 처리위원회 발전 그리고 정부의 반응 등을 연일 보도했다. 3월 10일 폐간된 지 1일 만에 보도는 정부측으로 전향되기 시작하였고 정부가 계엄을 선포한 것은 반역자들을 제거하고 동포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거듭 천명하였다. 타이완출신 직원 상당수가 228사건중에 생명을 잃었는데 처리위원회와 관련 없는 롼차오르阮朝日 사장과 일본어판 총편집장 우진리엔吳金鍊 그리고 인쇄소 공장장 린지에林界, 가오슝高雄지사 주임 추진샨邱金山, 쟈이嘉義지사 주임 수시엔장(蘇憲章) 등이 사망자 중에 포함됐다.


타이완 라디오 방송국



유적지 소개

 1930년 타이완총독부 교통국 체신부는 라디오사업의 발전을 위해 현 위치에 타이베이 방송국을 설립하고 1931년 타이완방송협회를 결성하고 라디오방송 업무를 인계 받아 운영하게 되었다. 전쟁 후 1945년 국민당정부가 이를 인수하고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47년 228사건이 발생하자 방송국은 당,정,군계 인사의 정책 홍보와 시민대표가 사건처리 근황을 보고하는 주요 매체의 역할을 했다. 1949년에는 중국방송공사로 개칭했고, 1972년 중국방송공사의 신축 청사가 완공되어 이 건물은 타이베이시정부로 이관되어 타이베이시정부 공원 및 가로등관리처 사무청사로 쓰여지게 되었다. 1996년 타이베이시정부는 건축물이 228사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타이베이 228기념관 건물로 선정하였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8일 오후, 항쟁하던 군중은 행정장관공서 앞에서 기관총 탄압을 받고 사방으로 도망 갔다. 경비총사령부는 임시계엄을 선포했고 무장군경들은 시가지를 순찰하며 무차별 사격을 했다. 일부 시민들은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으로 가서 사건의 경과를 전 섬을 향해 방송하였다.

 28일 저녁, 경비총사령부 참모장 커위안펀柯遠芬은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에서 방송을 통해 장관공서와 경비총사령부의 사건처리 방침에 관하여 발표했다. 1.불범담배 단속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 2.소수 폭도의 일탈행위에 대해 경비총사령부는 이미 ‘임시계엄’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3월1일 오후5시, 천이陳儀는 228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방송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과실치사를 범한 단속요원은 이미 법원에 회부되었고, 사망 1인과 부상 1인에 대해서는 후한 배상을 했으며, 2. 자정부터 계엄을 해제하지만, 집회시위는 잠시 중지하고, 파업,수업거부,파시,구타는 허락하지 않으며, 3. 폭동으로 체포된 자는 보석이 가능하며, 4.참의원이 대표를 파견해 정부와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여 폭동사건 처리를 허가한다.

 천이陳儀와 커위안펀柯遠芬 직접 방송에 나와 상관조치를 발표하고 민심을 무마시켰지만 폭력적인 방법으로 상관언론을 압제하고 대대적으로 체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228 사태 동안 방송은 중요한 뉴스 소스가 됐다. 3월 2일 228사건 처리위원회가 설립된 뒤, 처리위원회는 방송을 통해 학생과 타이완출신의 옛 일본군을 동원하여 봉사대를 구성하였다. 3월7일 처리위원회는 선전조장 왕티엔덩王添灯은 《32조 대강大綱》의 내용과 천이陳儀와의 회면 교섭 경과를 방송했다. 사건 후기 공식 조사와 위로문 발표도 모두 방송을 통해 발표하였는데, 복건타이완(閩臺)감찰사 양량공楊亮功, 국방부장관 바이충시白崇禧 등 관리들은 일찍이 타이완 라디오방송국에서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 사건이 있은 후, 방송국 국장 린충(林忠)은 해임되었다. 직원 정중잉曾仲影, 송시엔장宋憲章, 천팅칭陳亭卿、천쟈빈陳嘉濱 등은 ‘질서방해’ 등의 이유로 실형 또는 구류에 처해졌다.


임시계엄

 전후 타이완을 인수함에 있어 민정체계의 수립 뿐 아니라 군사를 담당하는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와 정보 치안 계열(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약칭 군통국과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 약칭 중통국)의 진주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1946년 2월 군통국은 타이완에 대해 조사하는 여러 정보기관을 경비총사령부 제2처 조사실이 지휘하도록 통합함으로 경비총부 조사실 주임 천다위안陳達元은 공직자이면서 군통국 타이완지부장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 8월 군통국은 국방부 보밀국 (방첩 정보기관)으로 개편했고, 228사건 전날 밤, 천다위안은 행정장관공서 참사로 발령되어 타이완지부장 자리는 린딩리林頂立가 맡게 되었다. 보밀국 타이완지부는 정보조사기관이며, 체포행동은 경비총사령부 제2처에서 담당을 했는데 처장에는 린슈롼林秀欒, 부처장에는 야오후천姚虎臣이 맡았는데, 그들은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정보 치안계열의 특수 공작원이었다.

 연이틀 충돌이 발생했고, 충돌사태는 끊임없이 확산되어 타이베이시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자 행정장관공서와 경비총사령부는 2월2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헌병제4단 단장 장무타오張慕陶를 타이베이시 임시 계엄사령관으로 겸임할 것을 임명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집회시위는 금지되었고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으며 무장군경이 거리를 순찰하였는데 때때로 총성이 들려오기도 했고 시민의 사망소식도 전해져 왔다.

 많은 지방 유지들의 요구로 3월1일 오후 5시 천이陳儀는 비록 타이베이 지역의 계엄 해제에 응하였지만 시위와 파업 등의 행위는 여전히 엄히 금하였고, 거리의 총성 역시 계속되었다. 장관공서와 경비총사령부는 전 타이완을 여러 군사구역으로 구획하였다. 천이는 지룽基隆의 임시계엄사령관으로 스홍시史宏熹를 임명하였고 계속해서 스홍시에게 지롱에서 ‘간사한 폭도’를 숙청하도록 지시했다.

 관측이 표면적으로 친선의 자세를 유지 했지만 사실은 군중에 대해 별로 믿지 않았다. 커위안펀柯遠芬 쓴 “사변 10 일기”를 보면 그 중의 3 월 1 일의 기록 벌써 후속 비극의 발생 예고했다.


타이완성경비총사령부



유적지 소개

 1919년 총독부는 ‘타이완군사령관’을 설치하여 군사업무를 보좌하였다. 최초의 타이완군사령부는 수위안가書院街의 원 수비사령부에 설치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샤오난먼가小南門街의 보병 제2대대 옛터에 새 청사가 세워졌다. 1920년 8월 3일 타이완군사령부가 준공되어 군사 막료,무기,경리,군의관,수의사,법무 등 각 부서가 포함됐다. 1945년 5월 31일 미군의 타이베이 폭격으로 타이완군사령부가 일부 파손되었다. 전후 국민당정부가 건물을 인수해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로 사용했는데 이는 계엄 기간의 최고 정보 집행기관이었다. 1992년 ‘국가동란평정시기’명령이 해제되면서 해제된 후, 여러 차례 개편을 거치면서 2004년 이곳에 ‘예비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요 업무로 동원,관리,봉사,민방위,예비역 병력 등과 관련된 일을 기획 및 집행하였다.

 2004년 1월 시 문화재으로 지정되었으나 대외적으로는 개방하지 않는다.

사건과 사적

 1945년 9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는 같은 해 10월 17일 사령부 참모장 커위안펀柯遠芬이 요원들을 인솔하여 제70군 주력부대와 함께 지룽基隆에 상륙하여 타이베이시에 주둔하고서 타이완의 일본항복과 인수업무 및 타이완 체류 일본포로의 송환, 타이완 치안의 유지를 전개하고 행정장관 천이陳儀가 총사령관을 겸임하였다

 1947년 2월 28일 행정장관공서 위병이 항쟁 중인 군중을 향해 총을 쏜 후, 경비총사령부는 이날 오후 타이베이 시내에 임시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 시위를 금지하고 매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를 특별 계엄시간으로 정하고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기차나 버스를 타고 시내를 통행할 수 없도록 했다. 참모장 커위안펀柯遠芬과 부참모장 판숭야오范誦堯는 천이에게 불법담배단속 안건을 경비총사령부 군법처에 교부할 것을 요청했지만 천이陳儀는 일반 재판소 재판에 회부하여 심리할 것을 고집하며. 커위안펀에게 계엄관련 업무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날 밤 경비총사령부는 지룽基隆에 있는 2개의 수비 중대를 타이베이로 이동시켰고, 펑산鳳山독립단 1영營을 북상시켰으나 신주(新竹)에서 시민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커위안펀은 군중에게 가해자에 대한 중징계는 약속했지만 이와 동시에 군사 배치를 진행하면서 정보기관에 228사건 참여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보밀국(방첩 정보기관) 타이완지부장 린딩리林頂立 사택



유적지 소개

 1933년 9월에 지어진 고진상회高進商會 사장 다카하시 류노스케高橋豬之助豬의 사택으로, 건물 외관은 전위적인 타원형 라인 형태로 설계하여 단수이강淡水河을 조망할 수 있는 당시 타이베이시에서 가장 모던한 주택 중 하나였다. 전쟁 후 타이완성 공공재산관리처에서 토지를 인수하고, 건물은 군통국의 천다위안(陳達元)이 사용하였다가 228 사건 전에는 보밀국 타이완지부장 린딩리林頂立의 사택으로 사용되었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는 내정부 조사국 본부(후에 지룽로 2단으로 이전)였다. 1970년에 원 건물이 철거되었고, 지금은 리버뷰 호텔이 들어섰다.

사건과 사적

 사건 기간 중 원래 린딩리林頂立의 저택이었고, 3월 8일 국군이 타이완에 도착한 후, 천다위안陳達元은 사건에서 활약했던 천이숭陳逸松(국민참정원)과 류밍劉明 (옌핑대학延平學院 이사)에게 당국이 곧 체포 행동을 펼친다는 정보를 토로하고, 이 두 사람을 린딩리林頂立 사택에 은신시켜, 당국 추적을 피하게 했다.


지룽 요새사령부



유적지 소개

 1896년 일본군은 지룽基隆에 요새지휘소를 설립했고, 1903년에는 지룽요새사령부를 설립하였는데 관할범위는 지룽基隆, 진산金山, 단수이淡水, 신주新竹, 허우룽後龍이 포함되는 일제시기의 타이완 북부 최고군사 지휘센터로 사용되었다. 같은 해 6월 지룽요새사령부는 지룽보基隆堡 다사완 마을大沙灣庄에 새롭게 건설되었다. 1919년 타이완군사령부가 설립되고 나서 지룽요새사령부의 각종시설을 보강하게 되었는데 1924년에 이르러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1928년 지룽요새사령부 청사를 건설하였고 1929년에 준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기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이 일부 파손되었고, 전후 인수되고나서 재건됐다. 1946년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에 예속되어 스홍시史宏熹가 사령관을 맡았다. 1957년 타이완성 보안사령부로, 1995년 이후에는 해안순방서로 소속이 바뀌게 되었다.

 2010년 지룽(基隆) 시 문화재로 지정하였고 2020년 지롱요시사령부 장교가족 숙소 복원작업이 완성되어 박물관으로 개방되었으며, 지룽요새사령부청사는 문화재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어 대외 개방하지 않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 행정장관공서 발포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바로 지룽에까지 전해졌다. 그날 밤 8시 지룽시경찰서 제1지국은 군중의 습격을 당했고 시내 곳곳엔 소동이 일어났고 외성인(外省人-중국대륙출신)과 사병을 구타했으며, 10여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하자 지룽 요새사령부와 헌병 경찰기관은 무력진압 방식으로 해산시키고 수색과 체포에 나섰다. 당일 밤, 공무 외출을 한 사령부 소속의 장병이 습격을 당해 부상하였고 실종된 자도 있었으며 자위용 권총은 탈취당했다. 타이베이에서 사령부로 가던 군용차량이 시즈(汐止)를 지나가던 중 습격을 받아 대위 계급의 부중대장이 총살됐고, 아오디澳底에서 기차를 타고 사령부로 돌아가던 장병들이 열차와 기차역에서 둘려 싸여 몰매를 맞았고 권총 3자루를 빼앗겼다.

 3월 1일 심야, 천이陳儀는 지룽基隆요새사령 스홍시史宏熹를 기륭임시계엄사령관을 겸하도록 임명했다. 오전 9시 사령부는 지룽에 대한 임시계엄을 선포했으며, 오후에 지룽시참의회의는 임시대회를 열었는데 참의원, 민중대표 모두 참석한 가운데 천이의 폭정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타이완의 자치와 즉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서 정치와 경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3월2일 오후 6시 천이는 계엄 해제를 지시했지만 해당 사령부는 여전히 지룽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보초병을 항무국, 시정부, 경찰서 제1지국과 중정구中正區 등의 주요 지점에 집결시켰다.


위안정元町파출소



유적지 소개

 일본통치시기에는 위안정元町경찰관파출소였으며 설립 시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원래 건물은 철폐되어 지금은 ‘지룽 동안 광장’이란 이름의 복합상가와 주차장이다.

사건과 사적

 2월28일 타이베이에서 충돌과 폭동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인접한 지룽지역에까지 전해져 군중은 이에 동참하고 위안정파출소를 공격하게 된다.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요새사령부 제2중대 장병들이 보위를 하였고 그 옆 제1창고에 군대가 배치되었으며 옥상에는 기관총을 가설했다. 그후 며칠 동안 시민들이 위안정파출수 앞에서 수비군에 의해 살해 당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지룽시 참의원 양위안딩楊元丁, 양아서우楊阿壽, 차이빙황蔡炳煌, 천구이취안陳桂全 등은 살상자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룽요새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수비군은 겉으로는 부응하는 척 하였다. 국군이 곧 도착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3월9일, 재편 제21 사단이 지룽항에서 상륙한 후 요새군대와 연합해 대규모 진압을 펼쳤다. 지룽시 경찰국에서 일하는 노동자 린무치林木杞는 군경에 의해 체포 및 구타를 받았다. 린 씨는 그 후 다른 시민들과 함께 파출소 옆 해만으로 끌려가 두 손은 뒤로 묶이고 철사로 손바닥이 관철된 상황 아래 총살되어 바다로 떠밀어졌다.